바순 연주자의 무대 일기 Performance Essay
Performance Essay · 2026 교향악축제
침묵을 뚫는 한 음,
봄의 제전이 시작되다
인천시립교향악단 바순 수석 ·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공연을 마치고
인천시립교향악단 · 인천아트센터 · 예술의전당·2026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곡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긴장의 순간 가운데서도, 단연 가장 예민한 찰나는 맨 처음이다. 고요한 암전 속, 오케스트라 전체가 숨을 죽인 그 공간에 가장 먼저 울려 퍼져야 하는 소리 — 그것이 바순의 솔로다. |
가장 낮은 악기가 가장 높은 음을 요구받을 때
바순은 오케스트라에서 대표적인 저음 목관악기다. 그 깊고 두터운 음색이 바순의 본령이며, 연주자로서 평생을 함께해온 소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스트라빈스키는 이 저음악기에게 작품의 첫 음을 맡기면서, 동시에 악기의 최고 음역으로 솔로를 써 내려갔다. 이 역설적인 설정이야말로 <봄의 제전>이 지닌 강렬함의 출발점이다.
최고음역에서의 바순 소리는 근본적으로 중저음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음이 가늘거나 이물감이 느껴지기 쉽고, 자칫 날카롭거나 공허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럼에도 스트라빈스키가 그 음역을 선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이 곡이 요구하는 것은 웅장함이 아니라 신비로움이기 때문이다. 얼어붙은 대지에서 돋아나는 첫 새싹 같은, 연약하지만 살아있는 소리. 거칠지 않고, 크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홀의 끝까지 닿을 수 있어야 하는 소리.
"여리고 신비로운 소리이지만, 반드시 멀리 뻗어 보내야 한다.
이 두 조건을 동시에 충족하는 것이 이 솔로의 본질이다."
리허설 — 살아있는 소리를 찾아서
공연을 앞두고 수차례의 리허설이 이어졌다. 리드(갈대)의 선택부터 시작했다. 바순에서 리드는 단순한 소모품이 아니다. 리드의 두께, 탄성, 개구 형태 하나하나가 음색과 반응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여느 연주와는 조금 다르게 이번 고음 솔로를 위해 여러 리드를 번갈아 시험하며 사운드 특성을 비교했다. 비브라토의 폭과 속도 또한 섬세한 조율이 필요했다. 너무 과하면 소리가 야해지고, 너무 적으면 음이 죽는다. 자연스럽고 살아있는 진동 — 그 아주 좁은 최적점을 찾는 과정이었다.
혼자 연습할 때와 오케스트라 전체와 합주할 때의 차이는 상당하다. 독주 상황에서 완벽하게 작동하던 소리가, 오케스트라의 호흡과 공기압이 더해지는 순간 전혀 다르게 들리기도 한다. 반대로 혼자서는 다소 심심하게 느껴지던 소리가 앙상블 안에서 오히려 생기 있게 살아나기도 한다. 리허설이 거듭될수록 오케스트라와의 앙상블이 살아나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나 역시 점점 더 편안하고 자신 있는 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음악은 리허설을 통해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Instrument Note · Heckel Bassoon No. 139XX
이번 공연에서 사용한 악기는 헥켈(Heckel) 제작 번호 13900번대 바순이다. 독일 헥켈사는 2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바순 제작사로, 악기 하나하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장인의 철학이 담긴 예술품에 가깝다. 이번 고음 솔로를 통해 이 악기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다. 헥켈 바순은 풍부하고 깊은 저음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고음역에서도 밀도 높고 노련한 음색을 구현해냄으로써, 여타 메이커 악기들이 쉽게 도달하기 어려운 수준의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두 홀, 두 경험 — 인천아트센터와 예술의전당
이번 공연은 두 무대에서 이루어졌다. 인천아트센터와, 국내 클래식 음악의 상징적 공간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이다. 두 홀은 규모와 음향 특성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예술의전당이 훨씬 더 넓고 큰 공간이다. 그래서 자칫 여리고 섬세한 바순 고음이 공간에 묻혀버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예술의전당은 이미 수없이 오른 무대다. 오랜 시간 그 홀에서 연주해온 경험이 있기에, 연주자에게 얼마나 편안한 공간인지 몸으로 알고 있었다. 물론 객석이 얼마나 채워지느냐에 따라 음향의 결은 달라진다. 관객이 가득 찬 홀과 절반만 찬 홀은 소리가 퍼지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 관객이 객석 어느 자리에 앉느냐에 따라서도 소리를 전달받는 양과 느낌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좋은 홀은 연주자에게 있어 일종의 공명판이다. 그 공간과 소리가 맞아 들어갈 때, 연주자는 악기를 넘어 홀 전체와 함께 음악을 만든다는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지휘자와의 아이컨택, 그리고 첫 C음
무대 위의 시간은 압축되어 있다. 지휘자와의 짧은 눈빛 교환 — 그 찰나에 모든 것이 시작된다. 어택 없이, 바람이 자연스럽게 스며드듯 첫 음을 시작했다.
'C음. 이 첫 소리 한 음에 이 솔로의 전부가 담겨 있다' 라고 생각하며 중요하게 임했다. 음색, 음량, 음정, 비브라토, 그리고 공간을 향해 소리를 보내는 방향성 — 이 모든 것이 첫 음 하나에 응축된다.
홀이 울렸다. 그 뒤로의 시간은 어떻게 흘렀는지 지금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마음속 긴장과 집중이 극도로 교차하는 상황에서, 연주자의 의식은 오히려 온전히 소리에 집중되어 기억 대신 감각만이 남는다. 다만 관객에게 음악이 닿고 있다는 감각은 분명히 느꼈다.
"엄청난 신중함과 긴장감이 교차하며 어떻게 연주했는지 기억이 잘 없을 정도다.
그 망각 속에서 비로소 음악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기립, 그리고 그 순간의 의미
오케스트라 무대를 시작한 이후, 이 무수한 연주 중에서도, 그 찰나의 기립과 박수는 분명 각별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연주자는 매 순간 완벽을 추구하지만, 무대 위에서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다만 살아있는 음악이며, 그 음악이 연주자와 청중 사이에서 진정으로 교환되는 순간이다. 이번 <봄의 제전> 무대는 그 교환이 이루어졌다는 확신을 남겨준 공연이었다.
좋은 음악을 함께 만들어준 인천시립교향악단의 모든 동료 단원들, 그리고 이번 공연을 이끌어주신 지휘자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전한다. 두 무대를 찾아주신 모든 청중에게도. 그 박수 소리는, 오늘도 연주자로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바수니스트 이준원
2026 교향악축제 ·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공연을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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